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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세째주(5월 19일-법사 신규탁 교수)
작성자 : 보광사 / 등록일 : 2019-05-16 / 조회수 : 750

오늘의 법회는 부처님께서 <원각경>을 왜 설하셨는가?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저 법사의 개인적인 의견을 여러분들게 밝히기 보다는, 훌륭하신 큰스님의 말씀으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스님이란 화엄종 5조로 추앙되는 규봉 종밀 스님입니다. 대단하신 학승이자 수행승이며 사상가입니다. <원각경>에 관한 수많은 주석서를 남기신 분입니다. 그 주석서의 일부분을 제가 번역한 것이 우리가 교재로 사용하는 <원각경・현담>입니다. 234-249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하에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규봉 스님께서는 10가지 이유 때문에 세존께서 <원각경>을 설하고 계신다고 분석하셨는데, 그 열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인되는 수행에는 근본이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첫째는 원인되는 수행에는 근본이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문수보살이 (부처님께서) 최초에 발심하셨던 수행의 출발점을 묻자, 부처님께서 “모든 여래는 모두 깨끗한 깨달음을 뚜렷이 관찰하는 방법을 통해서 무명이 공함을 깨쳤고, 이로 인해 청정심을 내어야 마침내 바라밀을 닦을 수 있다”(「문수장」의 「1) 핵심을 대답하심」(26~27쪽) 참조.)고 하신 것 등이다.

 

 

 

2) 수행의 결과인 (보리와 열반이) 실재한다는 상을 없애 원각을 성취시키기 위해

 

둘째는 수행의 결과인 (보리와 열반이) 실재한다는 상을 없애야만 원각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보리’라든가 ‘열반’이라든가 하는 것은 본래 없고, <이 둘은 무언가에 의지해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임.> 오직 이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만이, 비로소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 궁극의 과보이다. 그러므로 “열반도 지난밤의 꿈이고, 불국토도 허공 꽃이다”(「보안장」의 「나) 보는 경계가 같아짐」(63쪽) 참조.)는 등으로 설하셨다.

 

 

 

3) 이치를 깨달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것을 가려내기 위해

 

셋째는 이치를 깨달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보현보살이 의미를 여쭈어 말했다. “깨달음의 성품이 본래 뚜렷하고, (거기에서 생겨난) 일체의 존재는 모두 환상과 같다. 환상은 공하여 본바탕이 없으니 누가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만약 수행하지 않으면 무엇에 의하여 깨달음을 증득할까요?”(「보현장」의 (35~36쪽) 참조.)

이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일체를) 환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를 일으켜서 뭇 환상을 제거하라. 환상이 다 사라지고 지혜마저도 사라지면, 깨달음의 마음이 뚜렷하고 분명해 진다”(「보현장」의 (41~42쪽) 참조.)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지금 그저 (모든 게) 공이며 환상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수행을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고, 수행해서 익혀야 한다는 자들은 (수행에 의해서) 얻을 그 무엇이 있다는 오류에 빠진다.

참으로 ‘깨달음[悟]’와 ‘닦음[修]’의 의미가 마치 서로 상반되는 듯하지만, 실은 서로 부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규명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 이치는 반드시 가려내야 한다.

 

 

4) 깊고 깊은 의심을 싹 없애기 위해

 

넷째는 깊고 깊은 의심을 싹 없애기 위함이다. 이를 테면 (금강장) 보살이 의미를 따져 말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지금은 이미 무명에 싸였으니, 시방의 여래도 뒷날 반드시 번뇌를 일으킬 것이 아니겠습니까?”(「금강장」의 (68쪽) 참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의미를 답하여 “바로 (그대의) 이런 분별이 바로 무명이다. 그러므로 뚜렷한 깨달음을 보더라도, 역시 번뇌에 유전(流轉)하는 것과 똑같게 되며, 마치 구름이 지나가니 달이 움직이는 것 같다”(「금강장」의 (73쪽) 참조.)라고 말씀하시는 등이다.

그저 한 생각이라도 생기지 않으면, 한 생각 이전의 인식과 한 생각 이후의 인식이 끊어진다. 마치 눈병이 나으면 허공 꽃이 없어지는 등과 같다. (「금강장」(74~75쪽) 참조.)중생이 부처이지만, 그런 줄 아는 이가 드물며, 알더라도 믿는 이가 드물며, 믿더라도 이해하는 이가 별로 없으며, 이해하더라도 그 경지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원각경?에서는 (이런 점들을) 분명하게 완전히 다 해결하시니, 참으로 근원을 다 밝히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만약 (이 ?경?의 말씀을) 정교롭게 꿰뚫으면 여러 의심이 저절로 풀어진다.

 

 

 

5) 윤회의 근본을 끊어 없애기 위해

 

다섯째는 윤회의 근본을 끊어 없애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업(業)’을 발기시켜 ‘종자(種子)’를 만드는 것은 ‘무명(無明)’이 근본이 되며,(「문수장」(27~28쪽) 참조.) ‘업’을 적시어 목숨을 받는 것은 ‘탐애(貪愛)’가 근본이 된다.(「미륵장」(85쪽) 참조.) 만약 그런 행상(行相)을 모르면 도적이 곧 움직일 것이며, 만약 그것이 공한 줄 모르면 영원토록 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수보살과 미륵보살에게 대답하여, 끝 까지 파헤쳐 그 근원을 다 밝혀주셨다.

 

 

 

6) 숨겨져서 가려진 깨달음을 찾아내기 위해

 

여섯째는 숨겨져서 가려진 깨달음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아·인·중생·수자상 등의 이름이 비록 여러 경전과 같지만, (?원각경?의 경우는) 그 행상(行相)이 아주 깊고 은밀하며, 거친 것에서 부터 자잘한 것으로 갈수록 더더욱 제거하기 어렵다. 이는 마치 눈썹과 같아 밝은 거울이 아니고서는 비춰볼 수 없다. 아상도 이와 같아서 요의교(了義敎)가 아니고서는 밝힐 수 없다. 그래서 「정업장」(「정업장」(148~152쪽) 참조.)에서 겹겹으로 탐색하셨다.

 

 

 

7) 작은 양의 문장으로 여러 뜻을 담기 위해

 

일곱째는 작은 양의 문장으로 여러 뜻을 담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대승기신론?에서, <?원각경대소?에서 ?논?이라고 표기하여 인용하는 모든 경우, 그 제목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모두 ?대승기신론?이다.> “어떤 중생은 많이 듣고서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조금 듣고도 깊이 이해하기도 하며, 어떤 중생은 응축된 짧은 글을 좋아하여 (거기에서) 여러 뜻을 섭취하여 이해하는 이도 있다”고 하였다. 이 세 부류 중에, 글의 양은 방대한데 의미는 간략한 것은 ?대반야경? 등이고, 글의 양과 의미가 동시에 많은 것은 ?화엄경? 등이다. 둘째로 글의 양과 의미가 모두 간략한 것은 ?반야심경? 등이다. 셋째로 글의 양은 간략한데 의미가 넓은 것은 저 ?기신론?과 이 ?원각경?이다.

이를테면 글의 양은 한 축(軸)으로 되어 있고 종이는 28장이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종교(終敎)’와 ‘돈교(頓敎)’를 모두 갖추었고, <종교와 돈교야말로 이 ?경?에서 으뜸으로 삼는 것임.> ‘공종(空宗)’과 <「보안장」의 본문에서 아공관과 법공관 수행하는 것을 말씀하셨고, 나아가 6진 6식 18계의 하나 하나가 모두 청정함을 보여주신 것이 ?대반야경?과 같음.> ‘상종(相宗)’을 <5성(性)의 차별과 그에 따르는 수행과 증득의 지위를 말씀하신 것.>갖추었고, (‘대승’은 물론) ‘소승’도 갖추었고, <4대와 18계의 분별관(分別觀) 및 부정관(不淨觀)을 분석하신 것.> ‘원교(圓敎)’와 ‘별교(別敎)’도 겸하여 담고 있고, <6근·6식·6진·4대·3계를 나열하시고, 두 과목에서 일일이 셋이 평등하여 변함이 없고, 법계에 두루 하다고 말씀하신 것. 또 무너지지도 뒤섞이지도 않음이 마치 하나의 공간에 10만 개의 등을 켜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 또 3관의 개별적 수행을 말씀하시면서 동일한 법성(法性)에 의지하여 계··혜를 나타내시는 것 등.> ‘깨침[悟]’과 ‘닦음[修]’의 의의를 관통하여 분석해 놓았고, <법문 하나하나마다 모두 (원각을) 깨쳐 깨달음에 들어가, 법에 의탁하여 수행하니, 그러므로 3관 수행을 설명하는 첫 머리에 낱낱이 청정한 원각을 깨치고, 이렇게 깨친 청정한 원각의 마음을 사용하여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비로소 이렇게 저렇게 수행하라고 말씀한신 것 등.> 선문(禪門)의 ‘돈(頓)’과 ‘점(漸)’을 모두 갖추었다. 용궁 속에 간직 되었다고 하는 대승경을 두루 찾아보아도 이 ?원각경?보다 더 잘 갖추어진 것은 없다.

 

 

 

8) 한 법으로 상·중·하의 세 근기에 교묘하게혜택을 입히기 위해

 

여덟째는 ‘한 법[一法]’으로 상·중·하의 세 근기에 교묘하게 혜택을 입히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보안장」에서 말씀하신 관문(觀門)은 상근기에게 혜택을 입히시고, <돈교임.> 3관(觀)(그것을 조합한) 여러 결합은 중근기에게 혜택을 입히시고, 3기(期) 도량은 하근기에게 혜택을 입히신다. <이 둘은 점교임.> ‘한 법’이라고 한 것은 모든 문장마다 ‘원각’에 의지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시어, 결국에는 ‘원각’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9) 성품에 걸맞은 심원한 선정을 닦게 하기 위해

 

아홉째는 성품에 걸 맞는 심원한 선정(禪定)을 닦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러 학파의 선정의 방법은 ‘색계(色界) 태어나는 4종의 선정’과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는 4종의 선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기신론?에서는 ‘진여삼매’를 곧장 닦게 하고, 이 ?원각경?에서는 ‘원각의 관문(觀門)’으로 바로 들게 하신다. 비록 세 종류의 근기의 차이로 인해 돈(頓)·점(漸)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에 모두 ‘원각’으로 들어간다.

 

 

 

10) 차별적인 상을 떠난 밝은 스승을모시도록 권하기 위해

 

열째는 차별적인 상(相)을 떠난 밝은 스승을 모시도록 권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러 ‘겉모양을 따르는 가르침’에서 말하는 수행에는 법칙으로 삼아야 할 일정함이 있고 의지해야 할 (선각자들의) 발자취가 있다. 그러므로 착한 벗이나 스승이 전해주는 것을 언제나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원각경?에서는 “미혹은 본래 없다”고 하시면서도, 또 “(미혹을) 끊어 없애라” 하시기도 하시며, “중생이 본래 부처였다”라고 하시기도 하시면서도, 또 “수행하라” 하시기도 하신다. 모든 설법의 방식들이 모두 이렇다. 말세의 후학들이 의지해서 따르기 어렵다. 반드시 상(相)을 떠난 밝은 스승이 방향을 일러 일깨워 주심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가까이 하여 목숨과 온몸을 다 해서 모시고, 행·주·좌·와의 네 위의 속에 보여주시는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스승이 멀리 가더라도 원망하지 말고, 스승이 가까이 오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이렇게 모시고 귀의해야만 비로소 능히 뚜렷한 깨달음에 깨달아 들어간다. 그래서 선재동자가 처음 문수보살을 만나 이미 깨달음의 마음을 개발하려는 발심을 하자, (문수보살께서는 선재동자에게) 곧 착한 벗을 가까이 하게 하였다. 또 법계종(法界宗)의 취지는 그것이 숨었다 드러났다 하는 것이 밝히기가 어렵기 때문에, 스승을 모시는 것으로서 뒷날의 법칙을 삼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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